나의 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畵僧들]〈2〉 금호 약효 중

isong 2010. 5. 26. 10:21

[한국의 畵僧들]〈2〉 금호 약효 중
정혜-화장사 탱화서 새 도상 선보여
기사등록일 [2006년 10월 02일 13:36 월요일]
 
<사진설명>정혜사 극락전 칠성탱화.

불화에 입문한 금호 스님은 예산 화암사에서 공주 마곡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화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금호 스님이 마곡사로 거처를 옮긴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불화에만 전념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예산의 작은 사찰보다는 정상급 사격을 갖춘 마곡사에 불사가 더 많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 대부부의 화원이 그러하듯 금호 약효 스님 역시 당대 선배 스님들과의 많은 교류와 다양한 불화를 접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 갔다.

‘화기’상에서 금호 약효 스님의 당호인 ‘금호’는 언제부터 보일까? 선사나 강백이 그러하듯 화승 역시 자신의 작품에 당호가 새겨질 정도면 그만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기에 그의 당호가 새겨진 첫 작품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정희 원광대 교수에 따르면 금호 스님은 남양주 견성암 독성도(1882년)를 제작할 때부터 ‘금호’(金湖)라는 당호를 썼다고 한다. 또한 1883년 제작된 갑사 대비암 독성도〈사진〉를 제작하면서부터 ‘수화사’가 된 것으로 보아 금호 스님의 초기 불화세계는 이즈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보아야 할 것이다.

전라-경기서도 대 활약

<사진설명>갑사 대비암 독성도.

불화에 입문한 금호 스님이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수화사’가 된 것은 약 10년 후. 이전까지 금호 스님은 도제 형식의 ‘수습화원’기를 거쳤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금호 스님은 수원 봉녕사 석가모니(1878년), 용주사 오여래도(1882년) 등의 많은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 화기에서 약효의 이름은 수화사에 이어 두 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즉 당대 화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천기(天基), 혜과(慧果)를 비롯해 중예(衆藝) 스님의 ‘보조화원’으로 일했던 것이다.

그러나 견성암 독성도에 ‘약효’ 대신 ‘금호’라는 당호가 쓰임과 동시에 1년 후 제작된 갑사 대비암 독성도를 제작하면서부터 수화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금호 약효 스님만의 불화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수화사로 활동하던 초기의 다수 작품 중에서는 ‘정혜사 극락전 칠성도’(1884년·사진)와 이 시기 때 가장 기념비작이라 평가 받는 해인사 대적광전 삼신불화 중 석가모니 불화에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정혜사 극락전 칠성도’에 대한 원광대 김정희 교수의 평을 들어보자.

“칠성여래의 높은 육계와 도인모습의 칠원성군은 천기(天基)와 함께 그린 ‘봉녕사 칠성도’의 인물표현과 동일하며, 일광보살의 사자대좌와 월광보살의 코끼리 대좌는 용주사 오여래도의 사자대좌 및 코끼리 대좌를 모방했다. 그런가 하면 치성광여래의 법의형태, 건장한 신체표현 역시 봉녕사 칠성도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차츰 자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호 스님이 출초한 해인사 대적광전 삼신불화 중 ‘석가모니불화’(870호 사진 참조)는 ‘영은사 석가모니불화’(1888년)와 유사한 면이 많다.

소작인 염불소리에 ‘덩실덩실’

청련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방사형의 빛이 퍼져나가는 신광, 검은 수염이 더부룩한 사천왕, 날카롭게 마무리한 옷자락,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 가슴위로 불록 솟아오른 군의 등의 도상은 ‘해인사 석가모니불화’와 매우 흡사하다.

마곡사를 중심으로 충청남도에서 주록 활약했던 금호 스님은 세납 40대 후반부터 경기도와 충청북도, 전라북도의 불사를 맡으며 각 지역의 화승과 교류하며 다양한 불화양식을 접한다.

이 시기에 금호 스님은 경기도 관악산 화장사 불사의 수화사가 되어 구품탱, 현왕탱, 독성탱, 신중탱, 산신탱, 감로탱 등의 불화를 남겼는데 금호 스님의 대표 제자 보응 문성 스님도 이 때부터 작업에 참여하는 경향을 보인다.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금호 스님이 화장사 불사를 하면서 새로운 도상의 불화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설명>영은사 석가모니불 탱화.

‘화장사 감로도’는 화면의 좌우, 하단에 청록 산수로 그린 뒤 그 안에 상단과 중단, 하단을 그려 넣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상단에는 칠여래, 향 우측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향좌측에는 인로왕보살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단에는 갖가지 공양물이 진설된 제단과 병풍을 두르고 의식하는 스님들, 화염광배에 쌓인 한 쌍의 아귀와 상주가 그려져 있다.
이 감로도는 흥국사, 개운사, 경국사, 불암사, 봉은사 등 19세기에 서울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졌던 감로도의 도상과는 사뭇 다르다. 미술학계는 금호 스님의 안목과 함께 18세기에 그려졌던 감로도의 도상을 차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같은 해에 그린 ‘화장사 구품도’는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했던 구품도 중 ‘표충사 대흥원전 구품도’ 도상을 차용했다. 표충사 구품도는 금어(金魚) 긍율을 비롯해 임한, 경운, 덕화 등이 그려 표충사 승련암에 봉안한 것.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금호 스님은 충청남도 뿐 아니라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의 내로라 하는 화승들과의 교분을 두텁게 하며 자신의 불화세계를 초중기 때부터 왕성하게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금호 스님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 스님의 덕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국의 화승과 교류하며 작업을 하려면 보통 덕목 갖고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사를 할 때 가난한 절에서는 보시를 적게 받는 것은 물론 전혀 받지않고도 차별 없이 성의를 다했던 금호 스님.

많은 불사로 정재를 모아 논밭을 사 소작인들에게 주면서도 소작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평생 소작인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소작인과 그 가족들에게는 염불을 권했는데 소작인 집 앞을 지나다 염불 소리가 들리면 덩싱덩실 춤을 추었다고 하니 세인을 향한 스님의 자비심이 엿보인다.

불사를 마치고 보시를 나눌 때 자신은 물론 초학조수에 이르기까지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분배했다. 수화사로서의 권위를 감안한다면 초학승 보다 많은 보시를 가져야 했음에도 스님은 전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렇게 물었다.

“동수화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 지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보시를 나누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까?”
“못하는 사람이 애는 더 쓴다.”

불화를 그리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마음임을 은연중에 비추고 있는 것이다.

사진제공 = 성보문화재연구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871호 [2006년 10월 02일 13:36]

출처 : 茗田의 차사랑
글쓴이 : 茗田 원글보기
메모 :